야구장에선 투수가 詩를 쓰네
숱한 야구 문학 중에서도 시인 로버트 프랜시스(1901~1987)의 시 ‘투수’가 미국인들 사이에선 널리 사랑받는다. 시인을 투수에 비유한 시다. 겉으론 투수의 기교를 읊었지만 속으론 시인의 예술을 일깨워 준다. 이 시의 첫 연은 이렇게 열린다. ‘그의 기교는 기발하지, 그의 노림수는 노리는 척하면서 과녁을 맞히지 않는 것/ 그의 열정은 뻔한 것을 에둘러가기/ 그의 기술은 다양한 에둘러가기/‘
훌륭한 투수는 당연히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하되 스트라이크 존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을 잘 던진다. 투수가 정직한 직구를 던지지 않으면서 타자를 유혹하듯이 시인은 상투어와 직설법을 피해서 애매모호한 이미지로 에둘러 말한다.
흔히 투수에게 ‘스트라이크 같은 볼’을 던지라고들 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모순된 말이지만 투수는 그런 공을 지향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유치환 시인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가리켜 ‘소리 없는 아우성’ 이라며 모순어법을 쓰지 않았는가.
로버트 프랜시스의 시 ‘투수’ 는 일상의 대화와 시학(詩學)의 소통이 다르다고 했다. ‘남들은 이해하려고 던지지만 그(투수)는 순간의 오해를 위해 던진다/ (중략) / 소통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소통하기에 타자는 너무 늦게 이해한다’ 고 했다. 투수는 직구처럼 날아가다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거나 옆으로 휘는 변화구를 잘 던진다. 타자는 헛스윙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시에선 역설과 반어가 변화구 노릇을 해 독자를 잠시 헷갈리게 하다가 뒤늦은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투수는 야구공의 솔기를 눌러 잡는 방법을 달리해서 다양한 구종을 구사한다. 야구공을 묶은 실밥은 마치 상처를 꿰맨 자국 같기도 하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시는 후회와 향수(鄕愁), 실연의 아픔이 목구멍에 치밀어 오를 때 나온다”라고 했다. 투수가 솔기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듯 시인은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투수의 날카로운 슬라이더는 감정의 일렁임을, 완만한 체인지업은 정열의 추스름을 노래한 시를 떠올리게 한다.
일본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장편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에서 야구에 담긴 심오한 뜻을 재기 발랄하게 그려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투수는 야구를 통해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변화구의 주체는 투수가 아니라 공의 내적(內的) 원리라며 서양 철학을 들먹인다. ‘투수는 단지 계기를 만들어 줄 뿐이고 공이 공기의 저항 탓으로 제멋대로 움직인다’ 고 한다. 우리 문학에서도 야구를 통해 깨달음을 찾은 시인이 있다. 여태천 시인은 시집 ‘스윙’에서 야구를 통해 마음의 내밀한 풍경을 그려냈다. ‘플라이볼이 실재는/ 볼에 있는 걸까, 플라이에 있는 걸까/ 비어 있는 궁리(窮理)에 있는 걸까’ 라며 선사(禪師)의 화두 같은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기도 했다.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고도했다. 일상의 공간인 부엌에서 마음을 비우고 야구장을 상상하면서 국자로 스윙을 한다는 시인이다. 그렇게 야구는 때때로 생각의 물꼬를 터준다. 시가 때때로 마음의 숨통을 열어 주듯이.
투수는 공을 던진 뒤 새 공을 던지기에 앞서 포수 사인을 보며 머리를 흔든다. 시인은 말과 말, 행과 행 사이에서 머리를 쥐어짠다. “야구는 90%가 마음으로 하고, 10%를 몸으로 한다” 는 말이 있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심리전이란 얘기다. 그렇게 따지면 문학은 사람과 언어 사이의 심리전이다.
-박해현의 문학산책